행사주제
《거북이와 두루미》
2021년 타이포잔치의 주제는 ‘문자와 생명’입니다. 생명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순환의 고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순환을 만물의 이치이자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문자를 통해 그 도구적 활용을 넘어 바람, 신념, 상상 등 무형의 개념을 형상화해 표현하고 향유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메신저 대화창에서, 태블릿 스크린에서, 이메일 작성 창에서 누구나 바라는 바를 더 정확하고, 더 강하고, 더 아름답게 드러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문자를 다루는 기술’을 의미한 타이포그래피는 점차 시대의 취향을 드러내는 기호, 사람이나 동물의 얼굴, 그림 등의 다양한 재료를 아우르며 진화해갑니다.
한국에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육신은 스러져도 이름으로나마 존재하고픈 욕망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일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에 담벼락 담벼락에 서생원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는 1970년대 중반 한국의 TBC 방송사의 한 코미디 프로를 통해 유명해졌습니다. 자식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어준 이름이라는 설정으로, 한국에서 생물과 자연물을 통틀어 열 가지(십) 가장 오래(장) 사는(생) 것으로 여기는 십장생의 일부인 거북이와 두루미를 포함해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 산 인간, 18만 년을 살았다는 중국의 인물 등 긴 수명을 상징하는 존재의 이름을 모두 그러모았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지어 암기하고 부르던 노력에도 극 중에서 이름의 주인은 장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합된 단어의 리드미컬한 발음과 강렬한 심상은 크게 사랑받아 오늘날까지 여러 창작물에서 패러디되거나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죽고 이름은 남겨져 긴 수명을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동양의 그림에서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는, 생각이나 바람을 드러내는 사의적인 표현이 더욱 중요시되었습니다. 그래서 건강과 장수와 같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도교적 생명 사상이 더해진 ‘길상화’에는 거북이와 두루미 같은 십장생이 단골 소재로 등장합니다. 속세를 벗어난 고귀한 존재로 여겨지는 학, 수호와 발복을 상징하는 영물로 여겨지는 거북이는 이렇듯 많은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도식화된 미감이 더해져 일종의 문장이나 심벌처럼 매우 상징적으로도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모신 여러 문화권 작가들의 다양한 바람을 한데 모은 이번 전시에 붙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이름이 ‘거북이와 두루미’가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 거북이나 두루미가 한 마리쯤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문자의 뒤에 숨은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을 다루는 이번 타이포잔치 2021에 초대된 작품 사이에서 다양한 문화와 현상을 해석하는 재미와 조형적 아름다움을 찾아내주시면 좋겠습니다.
타이포잔치 2021 예술감독 이재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