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동안 스튜디오 마누엘 레더는 스스로 디자인하는 출판물이나 프로젝트를 위해 여러 활자체를 개발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크게 다름에도 그들은 모두 뚜렷한 개념적 성향, 우연히 발견한 형태에 관한 호기심, 전통적 활자체 디자인의 규약을 장난스레 무시하는 태도 등을 공통적으로 내비친다.
그중 몇몇 활자체는 구체적인 자료에 바탕을 둔다. 예컨대 마리아나 카스티요 데바의 «당신이 보는 세 가지 폐허»를 위해 만들어진 ‹패스티시›(2008)는 19세기 말 멕시코에서 출간된 문서에 기초한 활자체다. 마누엘 레더는 멕시코 출판인들이 개발한 혼종 서체 양식에서 영감을 받아 인쇄용 활자와 필기, 타자기 서체 등에서 요소를 혼합한 활자체를 개발했다. 전시회 «언어: 말과 행동 사이»(2013)를 위해 디자인한 선형 활자체는 라틴아메리카와 스페인 문화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스페인 출판사 에디시오네 데 볼시요의 로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역시 마리아나 카스티요 데바가 엮어낸 책 «불편한 사물들»(2012)에 쓰인 활자체 ‹파올로치›는 미술가 에두아르도 파올로치의 서신에서 찾아낸 타자기 서체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양혜규의 «그리드 블록 A3»(2013) 표지에 쓰인 ‹시우다드›는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입체 간판 사진에 바탕을 둔다. 한편 활자체 ‹엘 마에스트로›(2010)는 마누엘 레더가 멕시코시티의 유물 발굴 현장에서 발견한 레터링을 해석한 작품이다.
때로는 기존 서체나 접근법에서 독자적 서사나 예기치 않은 기능을 담을 공간을 파내기도 한다. 미술가 아스타 그뢰팅을 위해 개발한 활자체 ‹이너보이스›(2005)는 고전적인 연극 포스터 활자체에서 직접 파생했지만, 글자 내부 공간을 조작함으로써 마치 “인형이 글자를 삼켰는데 그 글자가 목에 걸린” 듯한 느낌을 전하려 했다. 마리아나 카스티요 데바의 전시회와 출판물 «만화경의 눈»(2009)을 위해 디자인한 활자체는 기존 서체 플랜틴을 해체하고 반복함으로써 만화경을 통해 본 듯한 형태로 변형했다. ‹마루›(2011)나 에란 셰르프의 «FM 시나리오»(2012) 전용 활자체는 언뜻 구성적 서체 범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루›는 문화 생산에서 자기 조직 실천과 친화성을 주제로 뮌헨 쿤스트페어라인에서 열린 여름학교 겸 전시회 «집단 친화성»과 관련된 활자체로, 반원과 직선을 조합해 만들어진 모듈 서체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하학적 서체와 달리, ‹마루›는 요소 결합에서 엄격한 규칙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느슨하게 결합한 형태들은 자기 조직이라는 행사 주제를 반영한다. 한편 «FM 시나리오» 활자체는 굵기가 서로 다른 직선을 결합해 만든 형태인데, 그 결과 나타나는 계조 효과 덕분에 활자는 인쇄 품질을 판단하는 시험 패턴 역할을 하기도 한다.
활자체는 위태로운 ‘존재론적 위상’을 차지한다. 한편으로 활자체는 소통 수단일 뿐이다. 자신의 존재를 부여할 만한 텍스트를 만나기 전까지 활자체는 몸뚱이 없는 목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폰트’는—아무리 비물질적이라 해도—엄연한 ‘물건’으로 느껴지고 취급되는 것이 사실이다. 활자체의 ‘물건 됨’은 그 형태가 현실 세계 사물을 떠올릴 때 특히 또렷하고, 나아가 불가사의하게까지 느껴진다. 스튜디오 마누엘 레더가 미술가 노라 슐츠를 위해 디자인한 ‹스펀지›(2013)는 작가가 직접 제작한 인쇄기의 스펀지 형태에 바탕을 둔다. 마치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낸 듯한 글자들은 슐츠 작품의 원초적 성질을 잘 반영한다. 한편 우크바르 재단(마리아나 카스티요 데바와 이레네 코펠만)의 책 «알리바이는 A»(2007)에 쓰인 활자체는 원통을 이용해 형태가 만들어졌는데, 여기에서 원통은 우크바르 재단의 학제적 야심을 반영하며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해주는 공간을 은유한다. 동시에 그 평면적이고 그림자 같은 형태는 프로젝트 자체의 공상적 성격을 얼마간 드러내주는 듯하다. 혹시 그것은 다른 곳, 다른 장소, 상상의 장소를 향한—보르헤스의 가상 공간 우크바르로 통하는—웜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