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포잔치 2013
서울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8월 30일 – 10월 11일
오전 10시 – 오후 7시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없음

문화역서울 284
100-162 서울특별시 중구 통일로 1번지
전화 02-3407-3500
팩스 02-3407-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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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book.com/typojanchi2013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크레딧

타이포잔치 2013 사무국
110-240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53
혜영회관 5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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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typojanchi@kcdf.kr

타이포잔치 2011

English / 한국어


잠재문학실험실
 
2013
오프셋, 사철에 표지
10.8 x 17.8 cm, 248쪽
편집: 김뉘연
디자인: 전용완

서울: 워크룸 스펙터

남종신
편집자, 한국

손예원
번역가, 한국

정인교
시인, 한국


타이포잔치 2013 리서치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잠재문학실험실»은 1960년대 프랑스에서 형성된 울리포(OuLiPo, ‘잠재문학 작업실’이라는 뜻)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책이다. 조르주 페렉, 레몽 크노, 이탈로 칼비노, 마르셀 뒤샹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 여럿 포함된 울리포는 프랑스 현대문학의 흐름 가운데서도 독특하고 주요한 실험적 움직임이었지만, 국내에서는 이름만 무성할 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문인과 수학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울리포 작가들은 각종 ‘제약’을 문학의 도구로 삼았다. 문학에 수학, 과학, 생물학, 음악 등을 끌어들이며 일상적 기능에 속박되어 있던 문자를 제약을 통해 해방하고, 그 속에서 문학의 잠재성을 발굴해내려 했다. 이들의 손을 통해, 일견 창작을 방해하는 듯한 제약들은 그 명확한 규칙성으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나 활용 가능한 무한한 창작 도구가 되었다.

이 책은 잠재문학 작업실 ‘울리포’를 단순히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울리포 작가들이 수년간 실험했던 창작 방식인 제약과 규칙을 한국어에 적용한 창작 실험들을 담고 있다. 책은 제1부 ‘잠재문학실험실’과 제2부 ‘잠재문학작업실’로 나뉜다. 제1부는 한국어 통사론에 맞추어, 또는 이를 일탈하여, 울리포적 제약을 수행한 실험들(시, 소설, 산문, 선언문 등)로 구성된다. 제2부는 이 실험의 기반인 울리포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한 자료집이다.


울리포란 무엇인가?—
문학의 권위를 해체한 제약

1960년 11월 24일 수학자 프랑수아 르 리오네와 작가 레몽 크노의 주도하에 첫 모임을 가진 울리포, 즉 잠재문학 작업실은 초현실주의와 파타피지크, 구조주의와 부르바키 등 양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을 휩쓴 여러 시대적・상황적 조류에 힘입어, 혹은 그에 반하여 자연히 파생된 문학의 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울리포 작가들이 직접 밝혔듯, 울리포는 어떠한 운동도, 이즘도, 학회도 아니다. 특정 방향이나 미학적, 정치적 견해를 품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울리포란 무엇인가? 그들의 이름 ‘잠재문학 작업실’에서 비롯해 얘기해보자면, 다만 이는 문학이 할 수 있을, 아마도 그럴 수 있으리라 추측되는 그 ‘잠재성’을 주목하고 이를 증명해내는 작업이다.

울리포 작가들은 이러한 잠재성을 증명하는 도구로 ‘제약’을 택했다. 즉 일정한 규칙을 세운 후 그에 따라 글의 형식과 구조를 변형하는 이 문학 실험은 그간 영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문학을 둘러싸왔던 경계와 그 권위를 무너뜨렸다.

제약은 즐거운 구속이다. 무한한 창작의 자유가 안기는 막연함을 우리는 이미 충분히 경험해보지 않았던가. 말놀이 내지 글놀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 장난은, 그간 문학이라는 이름을 덧입은 채, 그에 스스로 짓눌려 있었다. (…) 울리포적 말놀이, 글놀이의 중심 축은 ‘규칙’이다. 기존 문학은 ‘제약’이라는 규칙을 거치면서 탁월하게 탈바꿈되거나 형편없이 전락한다. 그 결과가 어떻든, 제약 가운데 문학은 반드시 재생산된다. 그러므로 잠재문학작업실과 잠재문학실험실의 문학 노동자들은 생산성이 보장된 글쓰기 노동을 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잠재문학작업실에 이어 자신만의 잠재문학실험실을 마련한 후, 기꺼이 그 방에 갇힌다. 잠재문학은 그렇게 세상 누구나 제 방에서 행하는 만인의 문학이 된다. “빠져나갈 작정으로 그 스스로 미로를 만드는 한 마리의 쥐”에 의해. [서문 중에서]

그리하여 울리포 작가들이 발견 또는 발명한 글쓰기 제약들은 다음과 같다. 단어나 문장, 글의 알파벳 철자를 해체한 후 새롭게 재조립하는 철자 바꾸기 제약 ‘아나그람’, 앞에서부터 읽으나 뒤에서부터 읽어도 같은 회문 제약 ‘팔랭드롬’, 특정한 글자를 지닌 단어를 제하고 글을 쓰는 제약 ‘리포그람’, 알파벳순으로 글쓰기, 쉼표와 구두점 없이 글쓰기, 정형시의 다양한 응용……. 울리포의 대표 작가 레몽 크노와 조르주 페렉 등은 이러한 제약을 성공적으로, 탁월하게 활용한 이들이었다. 울리포 주창자 중 한 명으로 박학다식했던 백과사전적 작가 레몽 크노는 바흐의 푸가에서 힌트를 얻어 한 가지 내용을 99가지 형식으로 변주한 «문체연습»(1947)을 썼고, 이어 14행 소네트 10편의 각 행들을 분리해 이를 조합하면 총 10의 14승, 즉 일백조 편의 시가 생성되도록 설계한 상징적 작품 «백조 편의 시»(1961)를 발표했다. 한편 1967년 울리포에 가입한 조르주 페렉은 특정 알파벳을 사용하지 않는 제약인 리포그람을 활용해 모음 ‘e’가 없는 소설 «실종»(1969)을 썼고, 이어 모음으로는 ‘e’만을 써서 «돌아오는 사람들»(1972)을 썼으며, 또한 지상 8층 및 지하 2층 아파트의 방 99곳과 그곳에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체스의 행마법에 따라 정교히 조합해나가며 거대한 퍼즐을 구성한 대작 «인생사용법»(1978)을 썼다.

한편 울리포 작가들은 1973년과 1981년, 두 번에 걸쳐 공동 저작물을 출간했다. 1973년 출간된 «잠재문학—창조, 재창조, 유희»에서 이들은 “울리포란 어떠한 문학 운동이나 과학적 세미나, 불확실성의 문학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밝히며 잠재문학 작업실의 참모습을 펼쳐나간다. 이 책에는 울리포 주창자 프랑수아 르 리오네가 작성한 두 편의 선언문인 ‹잠재문학—제1선언문›과 ‹제2선언문›에 이어 이들이 글쓰기에 직접 적용했던 다양한 제약들에 대한 설명과 예시가 실려 있다. 이어 8년 후인 1981년 출간된 두 번째 저작물 «잠재문학 지형도»는 이들의 보다 확장된, 긴 분량의 실험들을 담고 있다.

이후 울리포는 지속적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크노, 페렉, 칼비노 등 주요 작가들이 운명을 달리하면서 전성기가 접히는 듯했으나, 2013년 현재 울리포는 어느새 세 번째 대표를 맞이했고, 계속해서 새로운 구성원을 선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성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울리포적 글을 쓰거나 울리포 작가들의 글을 번역하거나 울리포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일례로 구성원 중 가장 젊은 미국 작가 다니엘 레빈 베커는 조르주 페렉, 프랑수아 르 리오네, 마르셀 베나부, 에르베 르 테이에 등 울리포 작가들의 작품을 영어로 옮기는 한편 울리포 연구서를 펴내 울리포의 과거와 현재를 기술하고 미래를 조망하기도 했다.

 
왜, 지금 울리포인가?—
잠재문학의 잠재성

그렇다면, 왜 지금 울리포인가. 196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당대에 만개했던 잠재문학 작업실의 현재성과 잠재성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수용하고 확장할 수 있을까.

현재까지 울리포 공식 웹 사이트(www.oulipo.net)에 등재된 잠재문학 작가들은 서른여덟 명이다. 그러나 주요 구성원들은 운명을 달리했기에, 활동하는 작가들의 수는 반이 채 되지 않는다. 올해로 창단 53주년을 맞이한 울리포의 역사를 가늠해봤을 때 이는 다소 쇠락한 현재일 수 있다. 그러나 울리포는 이미 그 파생 모임들을 여럿 낳은 바 있다. 건축, 그래픽 디자인, 만화, 문법학, 사진, 역사, 영화, 요리, 음악, 정치, 회화, 희비극 등 여러 분야에서 울리포의 정신을 이어받은 수많은 우익스포가 수년간 자체적으로 증식해왔다. 이들은 울리포적 제약을 각자의 창작 영역에 적용하면서 각 분야의 잠재성을 발굴했다. 특히 1980년 출범한 회화 분야의 ‘우팽포’와 1992년 창단된 만화 분야의 ‘우바포’의 경우, 시각 분야에서 다채로운 울리포적 창작물을 생산한 바 있다.

한편 문자의 울리포적 가능성은, 오늘날 기술 매체의 발달 가운데 다시금 새로운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례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나 인터넷 미디어 문자 소통 시스템에서의 글자 수 제한을 떠올려보자. 몇 년 새 부상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트위터의 경우, 140자 이하의 글자를 입력해야 한다는 제약 아래 있다. 이는 현대판 울리포적 제약의 대표적 산물로, 일상 속 소통 매체의 체계 안에 제약이 이미 내포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트위터 소설, 트위터 시 등 이러한 제약을 활용한 새로운 문학적 시도들도 한차례 인 바 있다. 물론 누군가는 이는 단순한 숫자의 제약일 뿐 언어학의 문법이나 통사 구조론과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울리포 제약 중 긴 단어나 문장이 짧은 단어나 문장으로 줄어들면서 새로운 문맥을 형성해내는 ‘축약’을 떠올려보면, 인터넷 세대의 언어 활용법 역시 울리포적 맥락 안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레몽 크노가 말했듯, “어쨌든 제약은 남는” 것인가? 그러나 여기서 울리포 작가들과 그 작업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그들의 제약은, 물론, 기록으로 남았다. 하지만 2013년 현재 울리포적 제약을 글쓰기에 창조적으로 적용해 널리 알린 예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주요 울리포 작가들이 울리포를 알리게 된 것은 바로 자신들의 탁월한 작품 자체를 통해서였음을 떠올려본다면, 오늘날 울리포 자체를 주목하고 재조명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다소 씁쓸한 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가 스스로 증명한 바, 제약이 낳은 구속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나려면 결국, 어쩔 수 없이 (울리포 작가들이 그간 탈피하고자 했던) (실체 불분명한) 영감이라는 것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인가?

그러나 다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제약이 영감을, 잠재를 낳는다. 그간 의식되지 않았을 뿐 모든 창작은, 이미, 일종의—어떤 종류이든—제약의 산물이다. 문학의 경우 일차적으로 글의 장르와 분량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제약 안에 있으며, 이러한 구조를 의도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탈장르・탈형식 문학이라 해도, 제약을 의식한 후 벗어나려 시도한다는 점에서 제약하에 있다. 또한 글이란 기본적으로 문법의 틀 안에서 또는 이를 벗어나 쓰인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문학은 이미 제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창조하는 자는 ‘제약’과 ‘잠재’로 가동되는 이 잠재문학의 구조적 눈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제약은 창조의 무한(하고 막연)한 자유를 속박하며, 이렇게 구속된 창조는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온갖 시도를 하게 되고, 그 발상의 전환 과정 가운데 우리가 그간 영감이라 불러왔던 그것, 잠재해 있던 그것이 비로소 일어난다. 이렇게 기존의 생각들이 재편성되는 가운데 역시 잠재해 있던, 재치와 재미를 동반한, 감동이라 부를 수 있을 그것이 비로소 생겨난다. [해설 ‹잠재문학의 잠재성› 중에서]

잠재문학은 계속해서 작업되고, 계속해서 실험되어야 한다.

 
잠재문학의 가능성—
창조, 재창조, 유희

우리는 감각과 의미 기저의 구조에 주목하고 수학이나 음악 등 강력한 장악력을 지닌 학문에서마저 문자의 구조적 조합성을 밀어붙였던 이 별난 미로의 건설자들을 살피려 한다. 감옥 속에서 죄수이자 간수로서 탐구해낸 제약은 잠재문학작업실과 잠재문학실험실에서 제작되고 실험된 글마다 적절한 장치와 도구로 기능하며 “소박한 재미”를 생산하는 틀을 구축해나간다. 그러므로 이 제약들은 ‘놀이 생성 기계’다. 이 기계를 잘 다루면 잘 놀 수 있겠지만, 능숙히 다루지 못할 경우 기계만 남고 인간은 소외될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기계 앞에 선 인간이 그러하듯. [서문 중에서]

이 책은 만들고(창조), 만들어진 것을 다시 만들고(재창조), 이를 통해 노는(유희) 울리포적 과정을 철저히 따르고자 했다. 그리하여 책의 제1부 ‘잠재문학실험실’은 울리포적 제약을 적극 차용해 한국어 통사론에 적용한 흥미로운 창작 실험들로 이루어졌다. 총 27편의 시, 산문, 소설(엽편), 선언문 등이 망라된 이 실험들은 울리포적 제약을 그대로 지키기도 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우회해 적용하기도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첫 문장을 35가지 방법으로 변주한 기법 중 우리 식으로 구현 가능한 일곱 가지 방법을 택한 후, 이에 따라 최인훈의 «광장» 첫 문장을 변주해 만든 한 편의 시. 48편의 시 제목들을 조합해 쓴 시. 알파벳순 글쓰기를 가나다순 글쓰기로 치환한 시와 동음이의어를 풀이한 시. 울리포 작가들이 즐겨 참조했던 프랑스어 사전 대신 «염상섭 소설어사전»을 택해 그 어휘로 쓴 소설. 또한 «국어 비속어 사전»에 수록된 어휘들 중 성에 관한 비어와 속어들을 추려 쓴 시. 입말 위주의 방언으로 시를 쓴 후, 이 시에 후주 격의 시를 달아 시와 시를 사슬처럼 엮기. 산문의 각 문장에 옛 시조 율격을 적용한 ‘율격 산문’. 원래의 산문 장르를 시 장르로 바꾸어 쓰기. 속담과 속담을 아이러니하게 접붙이기. 또한, 4・19 선언문과 68 혁명 구호들을 절묘하게 접붙이기. 각종 실험들에 뒤이은 주 ‘장치와 도구’는 이러한 울리포적 제약들과 그 제약에 숨은 의미들을 상세히,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제2부는 이러한 실험의 기반인 잠재문학 작업실, 울리포 자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한 자료집이다. 울리포 구성원 자크 루보와 마르셀 베나부가 작성한 글 ‹울리포란 무엇인가?›에 이어 울리포 주창자 프랑수아 르 리오네가 작성한 세 편의 울리포 선언문, 이들의 유용한 도구였던 제약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제약과 구속› 그리고 이 제약을 기준에 따라 나눈 ‹울리포 작업 분류표›, 38명의 작가들을 한 문장으로 설명한 ‹울리포 구성원›, 울리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울리포 연보›, 그리고 1960년대 프랑스에서 태동된 잠재문학 작업실이 오늘날 잠재문학 실험실로 꽃필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해설 ‹잠재문학의 잠재성›까지, 울리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객관적 자료와 그에 따른 분석을 통해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즉 앞서 진행된 잠재문학 실험실 속 유희의 기반을 수록함으로써 독자가 이 놀이의 근본을 헤아리고, 나아가 스스로 이를 활용해볼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놀이 생성 기계’를 비로소 잘 가지고 놀게 됨으로써 얻는 것은 사실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레몽 크노가 언급한 바, “소박한 재미”를 위한 것들일지 모른다. ‘제약’과 ‘잠재’로 문학을 재편성하려 했던 울리포 작가들의 숨은 야심은 결국 이들이 표방했던 소박한 재미 뒤로 그만 이미 가려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이것’일 수 있는 한, 잠재문학의 가능성은 이미 열려 있다.

물론 이는 잠재문학의 잠재성을 어떻게 드러내보일지 연구해본 여러 각도의 실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옳은 지침이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제약이 잠재일 수 있는 한, 어떤 가능성은 열리는 셈이다. [서문 중에서]

[남종신 / 손예원 / 정인교]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바다, 그래, 그 바다는, 여느 크레파스보다 진하디 진한, 푸르다 못해 검푸르고 거대하며 육중한 비늘을 그토록 무겁게 뒤채면서, 거친 숨을 내쉰다.
바다는 숨 쉰다.
과연!
푸르고, 육중한, 크레파스보다 진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바다는 숨을 쉰다.
해원(海原)은, 색연필보다 짙은, 거대한 쪽빛 비늘을 둔중히 일으키며, 호흡한다.
수심이 깊었으리라. 짙푸른 파도가 넘실댈 때마다 다소 버거워 보였는데, 저 바닥을 치고 올라와 깊은 숨을 쉬는 듯했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했던가? 푸르고 육중했던가? 그렇게, 숨을 쉬었던가?

[‹누구의 것도 아닌›, 3쪽]


어느 틈에 그리들 공연한 함혐(含嫌)을 품었던가. 말참섭(參涉)은 좀 해도 생글거리며 해망(駭妄)이 나곤 하는 J를 내심 귀애했기에, 다분히 발자해도 돌림성 없어 좋게 보고 또 사무실에서 가장 주밀(綢密)하다 싶어 은근히 K를 총애했기에, 섭섭함이 더하다. 요변(妖變)한 것들. 그만하면 저희나 나나 연상약(年相若)하다 할 것을! 망단(望斷)했던 일들도 한풀 꺾여 요사이 좀 너누룩이 맘을 다잡았나 싶었건만. 여자는 고개를 젓고 만다.

[‹삼 층 빌딩›, 12쪽]


죙일 나자빠져 무그리고 부루치 감고 뭐라꼬 처씨부러캐쌌는지 꿈사리 한번 징해부러. 그 꿈이 쑥대밭일랑가 내 있는 여가 구신 날 맹키로 소말마귄가, 싸개싸개 안 인나면 다리몽디를 쌔리 뿐질러삔다 캐도, 지 아부지 미친 맹키로 들럭퀴쌌고, 쇳바닥을 뽑아삔다 캐도, 눈꾸녕을 쑤셔뿔까 귓꾸녕을 뚜루삘까 과함곰쳐싸도, 그 가수나 입질은 도무창 끈티이도 없어야, 오꼿 깨나라깨나라, 입사베기 열 개라도 한약헐 말이 없어뿌러야,

[‹보루쿠집 가시내는›, 19쪽]


친애하는 학생 동지여! 낡은 세계가 너를 뒤쫓고 있다.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니,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네 행복을 산다. 그걸 훔쳐라.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 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으니,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만약 이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니, 너희 바지 지퍼를 여는 그만큼 자주 너희 두뇌도 열어라.

[‹혁명 전야—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74쪽]


사전을 펼쳐 단어를 찾아보자. ‘잠재문학’. 우리는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애석하게도 누락되어 있다. 다음의 글줄들은 나보다 더 적당히 써줄 만한 배고픈 이들이 주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허기를 달래도록 마련해놓은 한낱 전채일 뿐으로, 정의를 내리지는 않는다 해도, 어쨌든 몇몇 주안점을 제시해보려 한다. (…)

잠재문학작업실이 착수하려는 연구 가운데 두 가지 주요 경향을 구별해낼 수 있는데, 이 경향들은 각각 분석과 통합을 향한다. 분석적 경향은 과거의 작품들을 살핀다. 그 저자들이 짐작했던 바를 종종 넘어서는 가능성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일례로, 표절 작품의 경우, 내가 보기에 마르코프과정의 이론에서 도출된 몇 가지를 고려해본다면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통합적 경향은 훨씬 야심만만하다. 이는 울리포의 본질적 소명을 이룬다. 앞서 간 이들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길들을 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백조 편의 시» 또는 불대수적 하이카이가 그 예다.

[‹잠재문학—제1선언문›, 123, 126쪽]


OuLiPo

도판 제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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